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4-06 09:40
제 19 편 외갓집 가는 길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285

제 19 편

외갓집 가는 길

  방학이면 어머니는 날 내 쫓듯 당신의 친정인 경기도 포천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실향민이고 나는 종로에서 나고 자랐기에 시골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외가가 유일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었다. 부모가 도시 출신인 경우도 있어 유년기에 제대로 시골체험을 못한 아이들도 제법 됐다. 친가의 정은 못 느꼈지만 나에게 외가는 참 포근했다.

  당시 외가는 경기도 포천군(현재는 포천시)신북면 계류리에 있는 쇠죽골이었다. 평창이씨 집성촌인데 나의 외조부님이 장손이셨다. 외조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어머니 밑으로 한 분뿐인 외삼촌은 하심곡이라고 하는 곳에서 한의원을 하고 계셨다.

  38선에서 그리 멀지 않아 6.25 때는 새벽에 포소리를 시작으로 아침 6시에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와 아침을 해먹고 남으로 내려갔다는 외할머의 증언이 들어보면 38선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머니는 보따리에 ‘방학생활’이라는 방학 숙제집과 옷 몇 가지를 싸주고는 차비와 용돈을 조금 주고 나의 ‘똘기’를 믿는다는 눈치로 혼자 보냈다. 저학년 때는 딱 한 번 누나와 같이 가봤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꼬마 아이 혼자 시골의 외가를 갔으니 나의 모험심은 이때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외가 방문을 하는 여정을 뒤집어 보겠다. 일단 집에서 종로 5가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을 걸어간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현재 종로 5가 사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로 가다 보면 내가 다니는 효제초등학교 못 미쳐서 있었다. 거기서는 의정부, 포천, 동두천, 연천 등지로 가는 시외버스들이 있는데 거기서 소아용 버스표를 사고 버스를 탄다.

  버스에는 부대로 복귀하는 휴가 장병들이 반이고 나머지 민간인은 주로 노인네와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
  버스는 큰 버스도 있었지만 ‘하동환자동차제작소’에서 만든 마이크로 버스도 많았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버스 차장은 여자도 있지만 조수라 불리는 남자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의정부~, 동두천~, 포천~’ ‘직행 어쩌고 하면서 빨리 타기를 재촉한다.

  버스에 올라타면 어른들은 우선 담배부터 한 대씩 피워 문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의 간섭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댔다. 지금 흡연자들이 생각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승객들은 누구하나 뭐라 하지 않고 버스 창문을 죄다 열고 간다.

  버스가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돈암동을 거쳐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데  당시 미아리 고개는 좁고 꼬불꼬불했다. 높이도 제법 되 성능이 나쁜 버스는 사람이 걷는 속도로 힘겹게 올라갔다. 겨우 미아리 고개를 넘은 차는 창동, 도봉동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당시 수유리 가기 전 지금의 지하철 미아역 근처에 신일 중고등학교가 마무리 공사 중이었다. 주변은 전부 논이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도로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요사이 가보면 도로와 가깝게 있다. 도시 개발과 확장으로 도로가 넓어진 탓이다.
 
  수유리, 도봉동은 완전 촌이었다. 집보다는 논과 밭이 훨씬 많아 어느 시골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드디어 의정부다. 이제 외가는 반쯤 왔다. 내릴 승객 내리고 탈 승객을 태운 후 포천으로 달린다. 의정부는 이미 당시에도 시로 돼 있어 중심부는 제법 도시다운 면모를 갖췄다. 군사 도시답게 상당수가 군인이고 미군도 많이 보였다.
 
  아스팔트 도로는 의정부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편도 1차선의 좁은 비포장도로로 바뀐다. 그것도 빨리 못 달리는 건, 버스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우마차와 자전거가 뒤엉켜 다니고 자주 만나는 군용차량의 긴 행렬이 앞길을 막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워대니 창문을 죄다 열 수밖에 없고 그 창문으로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비포장도로의 먼지가 쏟아져 들어오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불만이 없다.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차 안에서 부채질을 하거나 일행하고 잡담을 한다. 오죽 먼지가 많으면 머리가 까만 사람의 머리에 먼지가 내려앉아 한참을 가다 보면 머리 색깔이 변한다.

  포천을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고개가 ‘축석고개’다. 지금은 고개 정상을 많이 깎아내리고 직선화시켜 고개인지 뭔지 모르게 지명으로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험한 고개였다. 높기도 하고 굴절이 심해 나는 고개만 들어서면 머리털이 쭈뼛거렸다. 무서움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지 버스 안에 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움켜잡고 간다. 그만큼 고개가 험했다.

  6·25 때는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이 엄청난 전투를 했다고 한다. 하도 사고가 자주 나다 보니 계곡 아래에 굴러 처박힌 차들이 즐비했을 정도다.

  축석 고개를 힘겹게 넘으면 ‘송우리’다. 당시 송우리는 초가집만 즐비했고 주변은 온통 논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변해도 너무 변했다.

  송우리를 지나 포천 읍내를 막 지나 왼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힘든 고개가 나타나는데 ‘무럭고개’다. 지금은 87번 국도로 승격됐는데 예전에는 지방도이자 군 작전도로였다. 이 고개 역시 지금은 직선화되고 많이 깎여 나갔지만 당시에는 굴절이 심하고 좁고 가팔라 사고가 끊이지 않던 험한 고개였다. 이 고개를 지나려면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버스는 차라리 걷는 게 빠를 정도였으니 얼마나 높았겠나.
 
  겨우 힘들게 고개를 내려오면 ‘하심곡’이다. 하심곡까지 오면 거의 다 왔다. 하심곡을 지나 드디어 내려 ‘소죽골’ 외가까지는 걸어간다. 마을 입구에 ‘외북 초등학교’가 있는데 미군 공병대가 지워준 목조 임시 건물 한 채가 학교의 전부였다. 그 학교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외가 친척 또래들하고 운동장에서 많이 뛰어놀았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본 풍경은 의정부를 지나서부터는 초가집, 논, 밭, 군부대가 전부다. 특히 군부대가 많이 주둔해있어 버스 정류장 이름도 00연대앞, 00대대, 공병대, 통신대 등 부대 단위를 표시한 곳이 많았다. 간간이 미군 전차와 병력도 많이 보이는데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훈련을 나왔다고 한다. 외가 근처에도 ‘축소사격장’이 있어 늘 군인들이 훈련을 나왔다. 당시 베트남전이 한참인지라 참전했던 새카맣게 그을린 “상사아저씨”가 훈련 나온 병사들에게 가혹한 기합을 주는 모습도 봤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집이 셋째 외종조 댁이다. 외조부는 남자로만 다섯 형제였는데 전부 한마을에서 살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벌써부터 집 입구에 나와 계셨다. 서울에서 한참 어린 큰 외손자가 보따리를 들고 혼자 왔으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나를 한참을 끌어안아 주신다. 외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자마자 외종조 댁으로 가 역시 인사를 드린다. 몇 집을 돌며 인사를 끝내면 드디어 하루의 일정이 끝난다.
 
  서울서 제법 일찍 출발하였건만 외가에 오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날 정도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온 것이다. 지금이야 길도 좋고 차도 좋아 서울집에서 출발해도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면 가는 거리인데 당시에는 멀고도 험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는 겁 없이 이렇게 방학 때면 수시로 다녔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대견스럽다.
 
  어른이 되어 다큐멘터리 연출한다고 겁 없이 세계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때의 경험이 큰 바탕이 되었을 싶다. 과연 요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이렇게 보낼 수 있을까?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려면 어릴 때부터 ‘여행’를 자주 보내라. 그것이 나의 경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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