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2-14 14:47
제 3편 진공관 전축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341

제 3 편
진공관 전축
  우리 집에 근사한 전축이 생겼다. 당시 전축은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웬만 한 집에서는 조그만 라디오 하나만 있어도 꽤 ‘문화적’인 집으로 간주하고 미제 제니스 같은 라디오 한 대만 있어도 잘사는 집에 속하던 시절에 전축이라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음악을 즐겨 듣는 나이도 아니지만, 동네방네 자랑할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 집이 잘사는 집이라서 전축을 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이웃집에 돈을 빌려 주었는데 빚진 이웃집 아주머니가 쫄딱 망하면서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천호동으로 야반도주하듯 도망을 쳤다. 그러면서 빚 대신 전축을 하나 놓고 갔다. 전축의 상표가 ‘별표’인지 ‘천일사’ 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멋진 ‘호마이카’ (원래는 포마이카라고 부른다) 가구 스타일로 만들었다. 네 다리가 있고 양쪽에는 스피커가 있으며 가운데는 문이 달려 평소에 문을 닫아 두면 그냥 가구처럼 보였다. 가운데 문을 양옆으로 밀면 아래에 턴테이블이 있고 가운데는 여러 조작 장치들이 있다. 라디오를 같이 들을 수 있는 겸용이었다. 가운데는 크고 작은 진공관이 여럿 달려있어 전원을 켜면 불이 희미하다 점차 밝아진다. 턴테이블이 있는 공간은 바늘을 움직이면 빨간 꼬마장식 등이 켜진다.                             
  엘피(LP)판은 전축 안에 세워서 보관하는데 가끔 엘피판보다 작은 도넛판도 있다. 이름 그대로 도넛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우리 집에는 주로 이미자나 더 오래된 대중 가수들의 히트곡 모음앨범 등이 있었다. 이은관선생의 배뱅이굿이나 회심곡 등 민요 판도 제법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을 레코드로 제작해 판매한 것이다.
  이웃 더벅머리 동네 형집에 놀러가면 미군부대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미제 원판이 몇 장씩 있다. 6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의 팝송인데 형은 그 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나는 이상하게 부모님이 한 번도 전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 분명 판은 있는데 도무지 전축을 안 들으시는 것이다. 대신 라디오는 옆에 끼고 자주 듣고 계셨는데 그 바람에 전축은 내 차지였다. 그렇다고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가 음악을 뭘 안다고 전축을 틀어놓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집에 있는 판은 다 들어봤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들은 민요 가락이나 배뱅이굿 한 대목 그리고 회심곡 앞 가락은 흉내를 내기도 한다. 어릴 적 들은 음률이 꽤 오래가는 모양이다.
  90년대 초반 이미자 선생님과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이때 내가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라고 했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나에게 점심도 사주셨다. 예전에 집에 선생님의 ‘동백 아가씨’ 초판이 있다가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나보다 더 아쉬워하셨다. 당신도 없는 판이었는데 지금껏 보관을 잘했으면 보물이 되었을 텐데 하시며 입맛을 다시셨다.
  라디오는 내 기억에 별로 즐겨 듣던 매체는 아니었다. 드라마나 연속극은 지금도 듣고 보지 않지만, 그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다큐멘터리로 밥을 먹고 사는 직업이 잘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기억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5분 반공드라마였다. 고 김정구 선생님이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의 시그널 음악이 나오면서 시작되는데 이 방송을 들으면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불쌍함이 절로 일어났다. 이렇듯 세뇌는 무서운 것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레코드를 가지고 오셨다. 초급 회화였는데 교재도 같이 있고 해서 배우기가 좋았다. 문제는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돌리다 다시 듣고 싶으면 정교하게 그 위치에 가지 않고 왔다 갔다 한다는 게 문제였다. 초등학교 2학년생에게는 무리였다. 우리말로 토를 달아 알파벳을 몰라도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게 귀찮아서 하다 말았다. 성인이 된 지금 가장 후회하는 점은 그 시절 영어회화만이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이다. 특히 언어는 머리가 굳기 전에 배워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왜 그때 깨닫지 못했을까. 지금도 못내 아쉽다. 
  우리 집에 떡하니 가구로 자리 잡고 있던 전축이 어느 날 없어졌다. 아마 어머니가 집에서는 별로 효용가치가 없어서일까 팔아 버린 것 같았다. 나도 크게 아쉬울 거는 없었다.
  동네 형 집에 놀러 가면 조그만 휴대용 전축이 하나 있었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큰 형님이 사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이름 하여 ‘야전’ 즉 휴대용 야외전축이었다. 앙증맞게 생긴 전축(턴테이블)은 레코드보다 크기가 작아 턴테이블에 올리면 레코드만 보였다. 동네 형은 ‘야전’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하고 당시 인기 대중가수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스피커가 작다 보니 음량은 별로였지만 그런대로 들어줄 만했다.
  얼마나 오랬동안 사용했는지 엘피판 홈에 문제가 생겨 같은 소절을 반복하면 형은 얼른 바늘을 옮겨 다음 소절로 넘어가곤 했다.
  80년대에서 90년 초반까지 널리 쓰였던 엘피판과 턴테이블은 내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후반 음악 작업을 할 당시 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녹음실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엘피판의 숫자가 녹음실의 규모를 말해주었다. 저작권의 개념도 없던 시절에 음악 감독은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자기만의 엘피판을 들고와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음악 부분에다 바늘을 올려놓고 미리 구동시킨 다음 감독의 큐 사인에 의해 턴 테이블을 잡았다 놓으면서 음악을 입혔다. 그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 한국인들의 손재주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음향기기는 그야말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여 가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진공관 시대를 거쳐 트랜지스터로, 디지털로 정신없이 변하였다.
 이제 “전축”은 서울 황학동 골동품 거리에 가도 귀한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고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진공관 없는 “현대화”된 전축을 만들어 파는 시대지만 전원을 키면 천천히 예열되면서 느리게 작동하는 진공관 전축이 보고 싶다.
  지금 시절이야 억대를 호가하는 음향기기를 설치하는 돈 많은 마니아도 제법 있지만 그래도 나는 예전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리면 빨간 장식 등이 켜지며 ‘찌직’ “찌이직”소리가 나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전축’이 그립다.
기회가 되면 베어토벤의 웅장한 교향곡을 옛날 “전축”에 올려놓고 듣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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