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5-10 15:32
제 38 편 소풍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194

제 38 편

 소풍

  매년 봄가을이면 소풍을 간다. 학년별로 가기도 하고 전 학년이 다 가기도 하는데 당시 우리 학교는 워낙 학생 수가 많아서 전 학년이 한번에 다 간 기억은 없다. 학교가 종로 5가에 위치하다 보니 주로 소풍을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우선 고궁은 빠짐없이 다 갔다. 당시 창경원(일제가 궁에서 원으로 격하하였다), 덕수궁, 경복궁, 비원(창덕궁을 일제가 비원으로 격하하였다.) 등으로 소풍을 다니는데 당시 경희궁은 서울 중고등학교가 학교 교사로 쓰고 있어 복원 전이었다. 종묘도 가고 삼청공원도 갔다.

  저학년 시절에는 주로 엄마나 이모, 고모 혹은 할머니가 따라갔다. ‘있는 집’ 아이들은 집에서 수발드는 ‘식모’가 음식을 잔뜩 해서 같이 가기도 했다. 고학년들은 관광버스를 전세해 멀리(실제로는 그리 멀지도 않지만) 동구릉 정릉 등 주로 서울 교외에 위치한 왕릉으로 갔다. 저학년 시절에는 그게 참 부러웠다.

  소풍 가기 전날 종례시간이면 담임 선생님은 이것저것 지시 사항이 많았다. 용돈을 많이 가져오지 마라, 음식을 적당히 해 와라, 시간을 잘 지켜라, 내일 비 안 오게 몸가짐 잘하고 자라 등등 평소보다 종례가 길어진다. 담임선생님도 은근히 좋아하시는 눈치다.

  어느 학교나 소풍 괴담이 전해진다. ‘변소에 이무기가 어쩌고’, ‘소사 아저씨가 뱀을 어쩌고’ 하는데 이는 비가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당시 아이들은 비교적 순진해서 그런 말도 믿는 듯했다.

  드디어 소풍 가는 날. 이날은 전 학년이 소풍 가는 날이다. 당시 5형제 중 누이와 나, 그리고 동생 하나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 어머니는 꼭두새벽부터 김밥 싸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전날 준비한 나무로 만든 1회용 도시락과 서울 사이다, 빨간 사과, ‘미루꾸’ (캐러멜), ‘요깡’ (영양갱), 껌, 수통, 찐달걀, 소금, 사탕, 과자를 골고루 ‘리꾸세꾸’(륙색)에 담아 준비해놓으셨다. 김밥 속 고명은 소고기 볶음, 달걀지단, 시금치, 홍당무, 단무지, 등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내가 싸간 김밥이 단연 최고 인기였다.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약간의 용돈과 함께 날을 듯이 학교에 가면 평소에 늘 지각하는 친구는 벌써 와있고, 매일 누런 코를 흘리고 다니는 녀석도 오늘은 말끔해져서 와 있고 여기저기 들뜬 분위기다. 이 날 만큼은 담임 선생님도 하얀색 운동복에 모자까지 멋들어지게 쓰고는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젖히신다.

  전교생이 온갖 총천연색 옷차림을 하고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드디어 학년별로 출발하는데 오천여 명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 학교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장관이다.

  우리 학년은 이미 가본 적이 있는 창경원으로 향했다. 몇 번 가보았지만 그래도 창경원이 제일 재미있는 게 동물원, 식물원 등과 놀이기구가 많아서였다. 일제 강점하에 궁을 훼손하고 원으로 격하시킨 일본의 뜻을 당시 알 수 없던 우리는 마냥 재미있기만 했다.

  소풍의 프로그램은 별거 아니었다. 종로5가에서 동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원남동이다. 대략 아침 9시쯤 천천히 걷고 여유 있게 출발해도 10시면 창경원에 입장했다. 그러면 담임 선생님의 안내대로 창경원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전이나 각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소풍을 주중에 가다 보니 관람객은 한산하다. 가끔 외출 나온 미군들이 삼삼오오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구경을 하기도 한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담임 선생님이 ‘지금부터 점심을 먹자!’라고 하면 일제히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한다. 같이 따라온 가족끼리 둘러앉기도 하고 친한 아이들끼리는 가족들도 같이 어울린다. 선생님의 도시락은 ‘있는 집’ 아이인 반장이나 학급회의 회장이 준비해온다. 도시락을 준비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담임 선생님은 소풍 전날 특별히 ‘있는 집’ 아이 몇 명을 불러 여분의 도시락을 준비시킨다. 학교생활 중 즐겁고 유쾌한 행사가 소풍인데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을 위한 나름 배려였다.
  나도 가끔은 ‘있는 집’ 아이 취급을 받아 여분의 도시락을 준비해간 적이 있다. 이럴 때는 어머니가 더욱 신경을 써서 도시락을 만들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워 늘 기성회비도 제 때 못 내고하던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는 뭔가 생각이 많고 앙다문 입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얼굴에는 버짐이 하나 가득이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담임 선생님이 도시락을 준비 못 한 몇 명의 아이들을 따로 불러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이 친구는 한사코 거부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담임선생님도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이 자존심 센 친구는 결국 돌부처처럼 앉아 입을 앙다물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오기로 가득 찬 눈으로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대단한 자존심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얼마나 김밥이 먹고 싶었겠는가. 끝까지 자리하며 입을 앙다문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눈빛이 살아있었기에 지금은 아마 잘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 도시락은 김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로 김밥을 싸오긴 했지만, 김밥도 김밥 나름이었다. 잡곡이 섞인 밥에다가 단무지와 시금치, 홍당무로 속을 한 김밥도 있었다. 김이 좋지 않아 그야말로 김밥 옆구리 터진 게 다수다. 그냥 흰 쌀밥에 달걀 완숙 하나 얹어 놓기도 하고 어묵이나 멸치볶음을 밥 옆에 두고 단무지 몇 조각으로 소풍 도시락을 싸온 아이도 제법 됐다. 이 정도만 돼도 보리밥에 김치를 싸서 온 아이에 비하면 고급이다. 음료수나 과자 등은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이사이에 ‘아이스께끼’ 장수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이 날 만큼은 별 관심이 없다. 각 반 담임 선생님들은 ‘있는 집’ 아이들의 학부형들과 점심을 같이 하는데 술잔이 오가며 얼굴들이 불콰해져 간다.

  오늘 소풍은 ‘보물찾기’를 생략하였다. 창경원이다 보니 보물을 숨기기도 마땅치 않고 무엇보다 놀이기구와 동물원이 있으니 볼거리가 넘쳐나는데 보물찾기가 뭐 재미있다고. 하긴 동물원이라고 해봐야 코끼리, 사자, 호랑이,독수리 등을 보면 끝이고 놀이기구도 몇 가지 타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보물찾기보다는 재미있었다.

  각자 자유 시간만큼 실컷 놀다가 정해진 시간에 다시 모인 후 학급별로 기념 촬영을 한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지만 창경원 식물원 앞을 배경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앉고서고 하며 찍은 사진이 있다. 소풍이 끝나갈 무렵 약주를 좋아하시는 담임 선생님이 드디어 만취 상태가 되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신 선생님을 반에서 덩치 크고 힘이 좋은 몇 명의 아이들이 부축하여 택시를 태워 드렸다. 다른 반 아이들은 아직도 담임선생님의 통제에 있는데 우리 반은 해방이다.
 
  창경원을 나서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온갖 잡상인들, 그중에는 소풍날 용돈을 갈취하려고 하는 다양한 사기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뽑기’부터 시작해서 주사위 굴리기, 조그만 종지 속에 주사위 놓고 돌리기, 카드 뒤집어 맞추기, 물방개, 위아래 바늘 맞추기, 긴 실뽑기 등 아이들을 상대로 한사기도 다양했다. 그 사기꾼들은 아마도 평생 사기질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그날 어머니가 꼭 손에 쥐어주신 거금(?)을 다 털리고 나서야 힘없이 집에 가면 쓰라고 준 용돈이지만 용처를 묻고는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며칠 동안은 어머니에게 욕깨나 들었다. 지금도 창경원 앞을 지나갈 경우 만취한 담임 선생님을 택시에 모신 생각이 나 혼자 웃음이 나곤 한다. 진작 돌아 가셨겠지만, 만약 살아 계신다면 지금도 약주를 즐겨 하실까? 머리 벗겨진 대머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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