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5-04 09:44
제 35 편 도시락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229

제 35 편

 도시락

  1968년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드디어 ‘벤또’(도시락을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를 싸서 다닐 때가 된 것이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누나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가는 게 많이 부러웠다. 4학년부터 오후 수업이 있기에 교과서는 잊고 갈 망정 도시락은 필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먹는게 참 중요하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우리 집 장남인 내 도시락을 사오셨다. 생애 처음으로 나만 쓸 수 있는 도시락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의 도시락은 거의가 비슷했다. 남학생은 양은으로 만든 노란색 사각형을 주로 사용하고 여학생은 보다 작지만 예쁜 꽃무늬가 있거나 색깔이 있는 도시락을 사용했다.

  도시락 안에는 조그만 반찬 통이 있는데 고급 제품은 반찬 통 안에 칸막이가 돼 있어 두서너 가지의 반찬을 담을 수 있었다.
  얼마 후에 나온 제품은 도시락 뚜껑을 가로질러 젓가락을 끼울 수 있는 ‘신제품’도 나와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마호병’ 도시락이라고 해서 보온 도시락이 나왔는데 상당한 상류층 아이가 아니면 구경도 못 했다.
 
  지금도 만나는 동창은 집이 꽤 잘 살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 친구 집 식모 누나가 보자기에 싼 찬합을 직접 교실까지 갖다 주기도 했다. 물론 밥과 반찬은 최고급이었다. 그 친구가 그때부터 잘 먹어서인지 지금도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비만이기는 하지만 풍채도 좋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당시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라 아이들의 반찬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주로 싸오는 건 일단 국물이 없는 마른 반찬 위주였다. 오뎅이라고 불렸던 어묵, 콩자반, 멸치볶음, 감자조림, 오징어채무침, 두부조림, 무나물 등이 기억난다. 생선은 비린내 때문에, 고기는 비싸서 싸오고 싶어도 못 싸오는 금지 반찬이었다. 김치는 가급적 국물을 짜서 김치 국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아주 있는 집 아이들이 계란부침을 밥에 올리거나 계란조림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소시지는 거의 보지 못 했다. 간혹 집에서 전날 제사가 있는 집 아이들은 제사 음식을 싸가지고 오는데 그날은 친한 친구들이 잘 먹는 날이다.

  밥은 거의가 혼식이었다. 보리밥이 제일 많았고 콩, 조, 수수, 팥 등을 섞기도 했는데 보리를 제외한 다른 잡곡은 드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비싸게 사먹는 건강 식단이다.
 
  그나마 이 정도로 싸오는 아이들은 살림 형편이 제법 괜찮은 아이들 이다.
상당수의 아이는 하나같이 보리가 더 많은 밥에 시어빠진 김치 조각이나 소금에 절인 염장무가 고작이다. 감자나 고구마 몇 알을 가지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찐 옥수수를 가져오는 아이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입이 짧은 아이들의 도시락과 바꿔 먹기도 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주번은 이미 큰 주전자에다 식수를 떠다 놓고 밥을 먹을 준비를 한다. 식수는 겨울에는 따끈한 보리차를 학교에서 제공했다. 반장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도시락 뚜껑을 열며 밥을 먹는데 교탁 위에서 내려다 보면 무슨 병아리나 강아지들이 먹는 모습과 흡사하다. 7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후루룩 짭짭’ 하면서 먹는 광경이 장관이다. 이쪽저쪽 반찬 내용이 비슷하니까 뺏어 먹을 일도 없고 그 맛이 그 맛이니 친구들 간에 다툼도 없이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밥을 먹는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하고 어느 학교의 급식이 좋으네 나쁘네 하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에는 먹는 게 빈부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단이었다. 

  아주 형편이 어려운 몇몇 아이들도 있었다. 서울 종로 6가에 자리 잡은 역사가 오래된 서울 5대 명문 공립학교 중 하나인 학교에 결식아동이 있는것이다. 그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도시락을 싸오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반에도 2~3명으로 기억나는데 담임 선생님은 몇몇 잘 사는 집 아이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도시락을 더 싸오게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끔 같은 반 아이들이 모르게 전달해주고 했다.

  그중에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빛만은 기억한다. 그 친구는 단 한 번도 도시락을 싸온 적이 없다. 남의 도시락을 얻어먹은 적도 없다.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나가서 끝날 무렵 어느 틈에 들어와 교과서를 펴놓고 공부를 했다.

  평소 말 수도 없고 누구 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 친구들이 그 친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완장(?)을 찬 책임감으로 그 친구를 유심히 관찰했다. 공부는 반에서 상위권에 있었지만 늘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앙다문 어금니는 순진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항상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옆에서 말을 걸기가 어려운 조숙한 ‘애늙은이’였다. 그러다 보니 더욱 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가 된 것이다.

  나는 70여 명 반 친구들과 거의 잘 알고 지냈지만 유일하게 이 친구와는 사귀지를 못 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눈빛과 앙다문 어금니만 생각날 뿐이다. 이 친구의 근황이 많이 궁금하다. 동창들도 전혀 기억을 못할 정도이니 지금 뭐하고 살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다.
  잘 풀렸으면 큰일을 할 수 있을 친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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