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4-27 09:55
제 31 편 깜보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199

제 31 편

 깜보

  한동안 잊고 지내던 단어가 얼마 전부터 뜨기 시작했다. 바로 “깜보”라는 용어이다. 영화 오징어게임을 통해 “깐부 할아버지”라는 배역이 흥행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전에도 영화 “깜보”(1986년 개봉, 이황림감독, 김혜수, 박중훈)가 나왔지만 흥행이 저조하여 금방 잊혀진 단어였다.
  내가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제작중이였는데 학생 신분의 김혜수와 완전 신인의 박중훈이를 가까이서 자주 본 기억이 난다.

  요즘 아이들도 ‘깜보’라는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깜보라는 말을 친구들하고 많이 사용했는데 그때는 그 말의 어원도 모르고 사용했었다. 성인이 되어 사전을 찾아보니 ‘원래 깜보는 피부색이 햇볕에 그을려서 검은 기가 좀 많이 도는 친구를 깜보라 부르는 것인데 그 뜻이 차츰 왜곡되어 친한 친구, 격의 없는 친구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평안도 방언이라는 설도 있다.

  반에서 인기가 좋은 친구는 많은 깜보를 맺고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깜보가 거의 없어 외톨이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깜보는 대개 한동네에 살거나 서로 죽이 잘 맞아 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간에 ‘은밀하게’ 약속하며 우정을 과시하는데 깜보를 맺는 ‘의식’은 별거 없다. 서로 마음이 맞고 친해지고 싶으면 어느 한 친구가 깜보를 하자고 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그러자 하며 서로의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우리 이제 깜보 맺었다’하면 깜보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단순한 ‘의식’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컸다. 깜보를 맺은 친구가 곤경에 빠졌거나 도움을 줄 일이 있으면 바로 도와줘야할 ‘의무’같은 게 생긴다. 그러다 보니 주로 깜보를 많이 맺은 친구는 반에서 반장이나 회장 같은 직책을 갖은 임원 아이들이 많이 맺거나 소위 ‘있는 집’ 아이들과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깜보를 많이 갖고 있다. 나는 비교적 깜보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내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탓이었다.

  그러다 서로 마음이 틀어지거나 도움을 주고받고 할 일이 없거나 견제 세력 아이에게 포섭되면 깜보를 그만두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또 그만이다.    이렇게 ‘조직’ 이 만들어지면 같은 반에서 ‘세’를 과시하며 보란 듯이 몰려다닌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처럼 특정한 누구를 따돌리거나 적대적이지는 않다. 특별한 비밀 결사도 아니고 해서 굳이 깜보를 맺었던, 아니던 크게 개의치 않고 같이 잘 어울렸다. 한참 유년기의 아이들이 서로의 우정을 그렇게 해서라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조금 얍삽한 아이들은 전략적으로 깜보를 많이 맺어 보호막으로 삼고 자기의 편의를 위한 경우가 많다. 성인 세계와 다를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의 본색이 드러나 결국에는 외톨이가 된다.

  아무리 어려도 당시의 분위기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어울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이성 간에 접촉이 있으면 바로 놀림감이 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립이어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남녀 합반이고 4학년부터는 별도의 학급이 편성되었다. 아직 이성을 느낄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당시의 어른들은 ‘남여칠세부동석’을 철석처럼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립초등학교는 6년 내내 남녀 합반을 했다고 해서 많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깜보는 남자아이들 간에 맺어지는 ‘우정의 약속’이었지만 여자아이들은 어떻게 우정을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선후배 여학생끼리 ‘엑스 언니’를 맺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체를 모르겠다.

  ‘이찌 가다’라는 말도 있었다. 요즘 말로 쉽게 표현하면 ‘짱’이거나 ‘일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찌 가다’ 혹은 ‘의찌 가다’라고도 하는데 일본말로 첫째 어깨라고 해야 할까? 반에서 몸집이 제일 좋거나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를 일컬었다. 그냥 몸집만 좋아서 누구나 ‘이찌 가다’가 되는 건 아니다. ‘깡다구’가 좋아야 했다. 몸집이 작아도 기죽지 않으며 큰 덩치 아이에게도 물러서지 않은 ‘악’이 있어야 했다. 나는 큰 몸집은 아니었으나 ‘깡’으로 넘버 투는 됐다. 학급의 ‘이찌 가다’가 워낙 순둥이여서 사실상 내가 ‘이찌 가다’ 노릇을 했는데 지금처럼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럴 일도 없었다. 학급 친구들 간에 그냥 암묵적으로 서열이 매겨지고 서열에 따른 자기 역할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힘이 약한 친구들을 보호하고 학급 일에 솔선하는 모범생다운 역할을 더 많이 했다. 담임선생님도 이런 학급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찌 가다’의 횡포라면 횡포일까? 밑에는 ‘꼬붕’을 데리고 다닌다. ‘꼬붕’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자기 부하 직원을 일컫는데 당시에는 일본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다. ‘꼬붕’에게 자기 책가방을 들리게 하거나 잔심부름을 시키기도 하는데 분위기상 대 놓고 하지는 못했다. 주로 힘없고 착한 아이들이 하는데 대신 ‘이찌 가다’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보호’를 해주었다. 어른 세계와 같다.
   
  요즘 큰 사회문제로 나타나는 ‘일진’이나 ‘짱’ 혹은 ‘왕따’ 분위기는 우리 시대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로 인한 ‘학폭’문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당시에는 학생 수도 많거니와 서로 어렵게 사는 환경이라서 그런지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고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요즘은 왕따, 학폭이 학교는 물론 군대, 회사를 막론하고 만연됐다고 한다. 심지어 왕따를 당한 사람이 자살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탄할 일이다.

  서로 돕고 살아도 어려운  세상인데 어쩌다 이지경이 됐는지 모든 사람이 반성해야 한다. 이러다가 모든 사람이 다시 “깜보” 맺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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