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4-21 10:05
제 27 편 운동회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266

제 27 편
 
 운동회

  예전에는 서울 하늘이 참 푸르렀다. 당시만 해도 차도 별로 없고 공해가 한결 덜해 서울의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랬다. 그 시절 미군들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면 지금처럼 황사, 미세먼지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푸른 가을 하늘, 오늘은 ‘운동회’ 날이다. 학교 행사 중 입학식, 졸업식은 의례적인 행사라 치고 소풍보다 더 재밌는 게 운동회다. 소풍이야 당일 하루오며 가면 그만이지만 운동회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청군, 백군 편을 가르고 사전에 선수도 선발하고 연습도 필요하다. 매스게임을 하는 학년은 오후 수업을 전폐하고 연습을 했다. 공부가 싫은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행사였다. 학업보다는 운동이 더 좋은 아이들에게는 모처럼 자기의 기량을 한껏 뽐낼 수 있는 기회였다. 일주일 정도는 학교가 온통 운동회 준비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체육복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우선 모자는 청군, 백군 어느 군에 속에도 사용할 수 있게끔 바깥쪽은 청색, 뒤집으면 백색이었다. 머리끈도 마찬가지로 양면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상의는 흰색 러닝셔츠로 통일이고 반바지도 뒤
집어 입으면 청백 어느 군에 속해도 관계없었다. 대단한 아이디어다.

  선생님들도 이 날 하루만큼은 산뜻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체육모를 쓰고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라이방’(썬그라스)을 눈에 척 걸친다.
  학교 본관 앞에는 하얀 광목 천막이 설치되 여러 귀빈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만국기가 가을바람에 펄럭거린다.
  운동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하루 종일 행진곡이 흘러나와 운동회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집에서 소풍 때 말고 ‘김밥’을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운동회는 그야말로 잔치다. 저학년 학생들은 보통 집에서 2~3명씩 따라 나오고 고학년 학생들도 시간 되는 학부모가 나오기에 학교 운동장은 사람이 차고 넘친다.
  인근 상가와 잡상인도 덩달아 ‘운동회 특수’를 누리고 하릴없는 학교 근처 주민들도 기웃기웃한다.

  개회식이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가 끝나고도 내외 귀빈의 격려사가 한없이 이어진 후 학생들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를 하는데 단체상과 개인상 등 부상이 푸짐하다. 그래 봐야 노트, 연필 등 학용품이 대다수인데 특별하게 ‘축하 스탬프’가 찍혀있어 두고두고 기념으로 아낀다.

  종목이라야 별것은 없지만 뭘 하더라도 재미는 있다. 하다못해 선수로 못 나가도 응원의 재미가 있는지라 아이들은 뭘 해도 열심히 했다.

  응원단장은 평소 반에서 활달하고 ‘까부는’ 아이들이 주로 나서서 하는데 3.3.7박수나 구호를 선창하는 게 고작이지만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자기 팀을 응원한다. 가끔 응원이 시시하면 ‘끼’가 다분한 아이들이 차례로 나와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불러 젖히는데 이때가 되면 그늘에서 보고 있던 어른들도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같이 불러 젖힌다. 간혹 약주가 과해진 어른이 나오면 선생님이 제지하기도 했다. 서울 같은 대도시는 덜하지만 촌에서는 그야말로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지역축제’이기도 했다.

  줄다리기, 달리기, 이어달리기. 기마전, 피구, 매스게임 등 기본적으로 하는 종목 말고도 대박 터트리기 등 재미있는 경기도 있는데 단연코 재미있는 건 줄에 매달아 놓은 과자를 입으로 따먹는 경기와 밀가루 범벅을 해둔 떡을 손 안 대고 입으로만 먹는 경기가 재미있다. 이 경기만큼은 평소 무섭던 선생님도 근엄한 아버지도 얼굴에 밀가루 범벅을 하거나 재밌는 모습이 연출 되기에 누구나 웃고 즐기는 경기다.

  어느덧 운동회는 절정에 치달으며 마지막으로 청군, 백군 가릴 것 없이 ‘대박 터트리기’에 나선다. 집에서 만들어온 ‘오재미’를 몇 개씩 갔고, 있다가 일제히 대박을 향해 던지는데 오재미는 콩이나 모래를 집어넣은 ‘놀이 주머니’를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드디어 대박이 터지며 박속에 있던 오색 색종이
와 긴 족자 글씨가 터져 나오면 운동회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아이들의 손에는 공책이며 연필 등 부상으로 받은 학용품이 손에 들리어져 있다. 가을햇살에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온종일 응원하느라 목은 쉬었지만 참 재밌는 하루였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선수’로 활약했던 친구들이 근육통을 앓아 끙끙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한 번도 운동회를 가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오라고 한 적도 없지만 아마 오라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 했을 것이다. 지금은 후회가 된다.

  어느덧 손자, 손녀가 셋인데 큰 손녀가 초등학교 4학년이고 막내가 1학년이다. 막내 손자가 초등학교 졸업 전에 운동회에 참석할 기회가 된다면 할아버지 자격으로 기어이 가보리라. 오래전 기억을 반추하며 ‘가족 이어달리기’에 선수로 나가야겠다. 문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손자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그때까지 건강관리를 잘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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