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4-18 10:01
제 24 편 가정환경조사서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280

제 24 편
                               
가정환경조사서

  매년 신 학년이 되면 어김없이 작성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학교에서 나누어 주면 집에 가지고 가 주로 아버님이 작성을 하는데 내용이 어마어마하다. 이름 하여 ‘가정환경조사서’다. 지금 생각해도 학생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모든 환경과 정보를 손금 보듯이 파악하는 ‘조서’였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에이포(A4) 용지 규격에 누런 질 나쁜 갱지에다가 등사기(그 시절에는 ‘가리방’이라고도 했다)로 밀었다.
  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들어간 나로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가 그 ‘조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나처럼 입학 전에 국문을 깨우치고 입학한 학생이 한 반에 이삼 명에 불과했다. 하기야 한반 칠십여 명 중 유치원을 마치고 온 학생이 두세 명에 불과했으니 글을 모르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기본적 호구 조사인 원적, 본적, 현주소, 성명 등을 기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정환경조사’에 들어간다.

  제일 먼저 재산 상태를 파악한다. 동산이 얼마이고 부동산이 얼마인지부터 파악한다. 다음은 주거 형태를 알아보는 항목인데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자가, 전세, 월세, 일세, 사택, 관사인지를 파악하고 집의 형태를 알아본다. 당시에는 아파트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은 잘 나지 않으나 한옥인지 양옥인지를 조사하고 슬라브 집인지 개량한옥인지 이층집인지 단독인지 공동으로 거주하는지 등등을 알아본다. 방의 숫자와 온돌인지 양실인지를 기재하고 평수 등 면적도 당연 기재 사항이었다.

  다음은 집안의 시설물을 알아본다. 변소(그 시절에는 화장실이란 개념이 아예 없었다)는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그 변소가 개인 혹은 공동인지, 재래식인지 양식인지, 목욕탕은 있는지 없는지 등도 빠짐없이 기재해야 한다. 집안의 난방은 화목(아궁이)인지 연탄인지 등도 필수 사항이었다. 그리고는 전기가 들어오는지 등도 확인해야 했다.

  다음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어 기억나는 대로 기술하면 신문, 잡지, 텔레비전, 냉장고, 전축, 라디오, 시계, 도서, 카메라, 종교, 자가수도, 공동수도, 우물, 등등도 세세하게 기재해야 한다.
  부모님의 나이와 학력, 직업 등을 기재하고 나면 다음은 형제 차례이다. 심지어 부모님의 소득까지 기재해야 한다.

  이렇듯 모든 항목을 기재하고 나면 용지가 빈틈이 없다. 결국 그 학생의 고향, 출신, 생활수준, 부모님의 직업, 학력, 재산, 소득, 등 모든 가정환경이 그야말로 경찰 정보서 보다 더했다.

  다음 날 학교에 제출하면 담임 선생님은 며칠 동안 꼼꼼히 검토를 한 후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가 봐도 좋은 옷을 입고 고급 문방구와 용모가 깨끗한 소위 ‘있는 집’아이는 대우가 달랐다. 어린 나이지만 담임 선생님의 ‘편애’가 남다르고 그 집 어머니가 오시는 횟수에 비례해 담임 선생님의 태도가 다르다는 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반면 허름하고 늘 콧물을 달고 사는 ‘꼬질꼬질’한 아이는 구박 덩어리였다.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 집안 환경으로 인한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종로 5가의 전통 있는 공립학교다 보니 재력, 권력과 유명 인사의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반면 도시화 바람이 불며 지방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주민 자녀들도 많았다. 그 들의 부모들은 주로 힘든 일에 종사하며 저소득인 관계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형편이 못되었다.

  학교에 운동회나 소풍 같은 큰 행사가 있거나 하면 ‘있는 집’아이들의 부모들이 한껏 ‘위세’를 부릴 좋은 기회가 온다. 또 봄가을로 대대적인 환경미화를 하는데 역시 ‘있는 집’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한 건지 본인의 위세를 생각해서인지 아낌없이 협찬을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간의 서열은 힘센 놈과 깡다구 좋은 놈, 그리고 ‘있는 집’ 아이들의 상호 공존과 공생이었다. 어른 세계나 지금의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모든 것은 ‘가정환경조사서’라는 학교에서 작성되는 ‘조서’로부터 시작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사실대로 정확하게 기재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엄포’에 집에 가서 정직하게 아버지를 상대로 전달한다. 아버지의 표정은 암담하기도 하고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 중에는 무학도 많았고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분들도 분명 계시었다. 그분들의 곤혹스러움은 어찌 말로 표현할까? 심지어 대서방에 가서 머리 조아리며 자기 자신을 다 까발려야 했을 우리 부모님 세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아프다.

  모든 교사가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에 치맛바람은 대단했다. 교사를 ‘돈’과 권력으로 회유하여 자기 자식이 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게 하고 학교에서의 불이익을 줄이며 ‘내 새끼만이 잘 되길’ 기원하는 기성 세대의 잘못된 관행이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듯 쓸쓸하기만 하다.

  요즘은 엄마의 치맛바람보다 아빠 찬스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바짓바람”이 불어댄다나 뭐 한다나. 아이들아 미안하다. 아빠 바지는 다 낡고 헤어져서 바람을 못 일으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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