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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4-17 10:24
제 23 편 초등학교 입학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421

제 23 편

 초등학교 입학

  1965년 초봄. 드디어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으로 진입했다. 내가 서울 종로 5가 효제동에 위치한 ‘서울효제국민학교’에 62회로 입학을 한 것이다. 당시 효제국민학교는 1895년에 개교한 메우 유서 깊은 학교였으며 소위 5대공립국민학교라 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국민학교였다.

  내 위로 누나가 하나 있는데 누나는 이미 62년에 입학하여 59회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초등학교를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65년 초에 ‘취학통지서’가 우편으로 왔다. 어머니는 나를 불러 앉히고는 이제 너는 학교에 가야 하니 선생님,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몇 번을 강조하셨다. 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한 나는 취학통지서를 봐도 뭔 글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어머니의 말씀만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광장시장으로 가시어 학용품 일체와 짙은 갈색 가죽의 어깨에 메는 가방을 사 주셨다. 당시를 기억하면 그 가방을 ‘란또셀’이라고 부른 기억이 난다. ‘란또셀’은 고급 제품이었다. 소가죽으로 만들어 질기고 튼튼했다. 상당히 고급 제품이어서 아무나 메는 가방이 아니었다. 우리 집의 형편이 ‘없는 집’에 속해 있었지만 집에서는 장남의 입학을 축하하는 의미로 ‘있는 집’ 아이들이나 메는 ‘란또셀’을 장만 해주셨다.

  드디어 입학식 날.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명찰을 달고 학교를 가니 이미 운동장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명찰 밑에는 아직 코를 흘리는 아이들은 손수건을 달고 온 아이도 많았다. 물론 나는 코를 흘리지 않았기에 명찰만 달고 갔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정해준 학급대로 줄을 맞춰 서있었다. 2반인가 6반인가 지금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잠시 후 여자 담임 선생님이 앞에 서시고 우리는 담임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더욱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고 몸집이 많이 나가는 데다 미모와는 거리가 멀고 한눈에 봐도 심술 맞게 생기셨다. 혹시 당시 선생님이 생존해 계시고 이 글을 읽으신다면 용서를 빈다.

  정식으로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국민의례 등 식순에 따라 식이 진행되는데 신입생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아나 애국가를 아나 그냥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긴 ‘훈화’가 시작됐는데 이때쯤 아이들은 딴 짓을 하며 지루해한다. 같이 온 엄마를 찾느라 목을 길게 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 벌써 힘이 드는지 그냥 주저앉는 아이, 불안한지 눈물이 글썽거리는 아이, 심지어 우는 아이까지 난리가 아니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줄 사이로 다니며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일제 강점 하인 1930년대부터 교사를 해온 교장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야말로 ‘일장연설’로 지루하기만 한 ‘훈화’를 끝냈다.

  아주 드물게 진짜 ‘있는 집’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아이를 찾아 ‘귀한 사진’을 찍는다. 다른 학부모는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지금 동창들 만나서 물어보면 한 명도 입학식 사진은 없다.
 
  지금 기억하기에 한 반에 대략 70여 명이 넘었다. 그런 학급이 15~6반 까지 있으니 어림잡아 ‘입학 동기생’이 천여 명이 훌쩍 넘었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위력이었다.

  지루하기만 한 입학식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의 인솔 하에 배정받은 자기교실로 들어가는데 워낙 학생은 많고 거기다가 학부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교실 복도부터 인산인해다. 눈치 빠른 엄마들은 일찌감치 교실 뒤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엄마들은 복도에서 목을 길게 빼며 자기 아이들을 찾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처음 경험에서 오는 불안감에 좌불안석이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뭐라 말씀하시는데 사실 아이들이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보단 학부모한테 하는 말씀인 것 같다. 준비물이라든가 지각, 결석, 변소 사용 등 단체 생활에 필요한 내용들을 설명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준다. 아이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 듯 불안한 표정들이다. 이날 입학식은 왁자지껄 이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이미 4학년인 누나 손을 잡고 등교를 했다. 집은 종로 6가이고 학교는 종로 5가에 있으니 등하교는 어려움이 없다. 누나가 있어 길을 잃어버릴 일도 없거니와 총기가 있어 잘 적응해 갔다.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이 아직 국문을 깨우치지 못하고 입학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유치원’을 마치고 온 학생이 한 반에 두 세명에 불과했다. 당시의 유치원은 아주 ‘있는 집’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아침부터 ‘가갸거겨’를 외우고 애국가를 부르며 간단한 셈법을 공부했다. 나도 한 달 정도 지나 국문을 깨우쳤다. 소경이 눈을 뜬 경험이다.

  당시의 교육은 ‘주입식’이었다. 무조건 ‘외어야’ 했다. 많은 학생들을 짧은 시간에 목표치까지 도달시키려면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성보다는 일정한 규격에 맞추어 낸 ‘대량생산’이었다. 콩나물 교실은 ‘수용’ 개념이다 보니 인성 교육은 뒷전이다. 이러다 보니 학습 지진아를 따로 돌볼 여유가 없어 그 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도태된 아이들은 영원히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일 년이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나도록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선생님과 대화 한번 못해보고 학년을 마친다. 지금의 교육 현실과는 너무도 달랐다.

  별의별 아이들이 있다. 한 번도 준비물을 못 챙기고 오는 아이, 걸핏하면 우는 아이, 변소가 무섭다고 그냥 똥오줌을 싸는 아이, 식모가 업고 등교하는 아이, 어린 동생을 업고 오는 아이, 다른 반에 가서 헤매는 아이(담임, 본인, 다른 학생도 서로 모른다) 등등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2학기에 접어들자 2부 수업이라 하여 오후에 등교했다. 학교 시설은 낡고 좁았으며 학생 수는 많으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지만 인근에 3부제를 하는 학교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았다. 2부제 수업을 하면 일찍 등교를 하여 학교 운동 시설물이 있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반에 들어간다. 평소에는 아이들이 워낙 많아 제대로 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월요일에는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한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를 듣고 각반으로 들어가는데 좁은 운동장에 최소 5천여 명에서 7천여 명의 학생들이 바글거리니 오가는 것도 쉽지 않다.

  종례를 마치면 청소를 하는데 처음에는 5학년 누나 형들이 와서 청소를 해줬다. 당시에 6학년생은 중학 입시가 있기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집에 오면 이제 입학을 했으니 응석은 어림도 없다. 밑에 동생들도 줄줄이 있다 보니 늘 어머니는 나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하신다. 학교 괜히 갔다.
  당시의 행정이 체계가 안 잡혔는지 58년생이 65년도에 입학을 하는 게 정상인데 57, 56년생도 보이고 59, 60년생도 섞여있다. 그래도 다 친구로 지내고 지금도 만나면 그냥 친구다.

  형제, 자매가 한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위 아래로 다양한 학년이 같이 다닌다. 나도 한때는 누나가 6학년, 내가 3학년, 동생이 1학년으로 같이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우리 집 다섯 아이는 전부 효제초등학교 입학생이다. 누나만 졸업을 했고 나부터는 전부 전학을 가서 졸업생은 못됐다.
  이종, 고종, 큰집, 작은집 사촌 간도 많아 지금도 동창회를 하다 보면 동창인지 문중인지 재밌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소풍과 방학을 두 번 보내고 운동회를 한번 하니 학년이 올라갔다. 사계절을 한국전쟁 직후 미군 공병대가 만들어준 콜타르 향이 진한 판자 교실에서 보내다 보니 어느덧 후배가 들어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가 어느덧 58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친구, 선생님에 대한 잔상이 기억나니 추억이 참 오래간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 학교 근처를 가볼 일이 있어 일부러 둘러봤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상전벽해란 말이 딱 어울리게 학교도 변하고 주변도 변했고 학생들도 변했다. 5천~7천여명이 뛰어놀던 운동장은 썰렁하기만 하고 2부제 수업을 하던 학교가 학생수의 급감으로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그야말로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영원히 당시 국민학교 입학하던 시절에서 크게 변함없다. 아직 철이 덜 든 까닭이다.
 ‘유년의 추억’은 그래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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