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3-02 15:24
제 8 편 노래하는 형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351

제 8 편

 노래하는 형

  바로 이웃집 장독대에서 누군가가 이른 아침 혹은 저녁 무렵에 노래를 부른다. 뭐가 뭔지 모르는 서양 노래를 힘 있게 불러 젖히는데 처음에는 그런대로 들을만 했으나 날이 지나니까 소음처럼 들려 짜증이 났다.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음대생으로 성악을 전공한다고 했다.

  이웃집에서 하숙하는 문제의 그 형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댔다. 특히 일요일 같은 날에는 노래 부르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이상한 것은 이웃 주민들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예술적 교양이 많아서인지 노래를 워낙 잘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숙집 장독대가 마치 형의 무대인 양 마음껏 목청을 돋우니 예술적 감각이 떨어지는 나에게는 엄청난 소음으로 들린다.

  하루는 모처럼 마음잡고 밥상 위에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또 알 수 없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서양 노래인데 나에게는 그냥 ‘돼지 멱  따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나는 참다못해 이웃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대학생 형에게 소리를 질렀다. 인제 그만 좀 하라고 했더니 형이 들은 척도 안 하고 나머지 노래를 다 하고는 천천히 장독대에  서 내려온다. 나는 눈을 부라리며 시끄러워 공부를 못하겠다고 하니 형은 씩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 표정을 하더니만 지금 자기가 부른 노래가 얼마나 명곡이며 좋은 노래인지를 설명을 하는데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내가 재차 이야기하니 형은 나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인다. 나는 꿀밤은 아프지 않았지만 얼마나 억울하고 약이 올랐는지 씩씩거리며 집에 왔다. 하지만 분이 안 풀려 복수만 꿈꾸고 있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나는 초등학생, 형은 대학생 이미 체급이 달랐다.

  복수의 칼을 갈고만 있던 어느 날. 그날도 일요일이었다. 대학생 형은 그날도 장독대에 올라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잽싸게 밖으로 나가 장독대 옆에서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 동요 등을 힘껏 소리 내어 같이 불렀다. 형은 깜짝 놀라 내려오더니 나에게 막 뭐라고 한다. 나도 지지 않고 악다구니를 하니 형이 놀라기도 했지만, 약도 올라 어쩔 줄을 모  는다. 나는 마구 미친 짓(?)을 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요즘 말로 ‘골질’을 한 것이다. 형은 황당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일요일 아침에 동네에서 아직 변성이 안 된 어린 꼬마가 ‘울부짖듯이’ 소리를 질러대니 앙 칼 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다가 결국 참견에 나섰다. 나는 더욱 악을 쓰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이웃 형을 성토했다. 동네 사람들이 형을 나무라며 내 편을 들어줬다. 결국, 나는 형의 사과를 받고서야 분이 풀리고 기분 좋게 집으로 왔는데 이상하게도 며칠이 지난 후 그 노랫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형이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슬며시 이웃집을 갔더니 마침 형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씩 웃는다. 나는 요사이는 왜 노래를 하지 않느냐고 바로 물어보기가 쑥스러워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제 화가 풀렸냐고 형이 먼저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찬찬히 나를 보더니 귀에 익은 짧은 노래를 조용히 불러주는데 천상의 소리였다. 나는 그동안 형에게 느꼈던 미운 감정이 사라지고 갑자기 형이 좋아 보였다. 아니 위대해 보였다. 인간의 목소리로 이렇게 듣기 좋은 노래를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형의 노래를 소음으로만 생각하고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의미를 되새기며 ‘감상’의 자세로 듣고 있으니까 내 마음속에 들어있던 모든 나쁜 감정이 봄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 일이 있었던 후에는 이웃집 형이 노래를 부르면 자세를 고쳐 않고 조용히 듣고는 했다. 나중에 중고교 음악 시간에 감상한 오페라의 여러 아리아는 이미 초등학교 때 ‘라이브’로 들었기에 더욱 귀에 와 닿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클래식에 빠져 공부는 뒷전인 채 청계천 음반가게를 뒤지고 다닌 기억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동대문을 울리던 우렁차고 멋진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노래를 불러주던 음대생 형이 하숙을 옮겼다고 하신다. 나는 당시에는 약간은 아쉬웠지만, 그냥 그런 모양인가 싶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 불러주던 노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바탕 ‘골질’을 한 이후에는 자주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시원하게 불러줬는데 이제는 아예 듣지를 못하니 섭섭하기만 했다.
 
  나는 지금도 머리 복잡한 일이 있으면 형이 예전에 불러주던 아리아를 찾아 듣곤 한다. 비교적 작은 키에 검정 뿔테 안경을 낀 이름 모를 음악학도. 

  혹시 지금 우리 성악계의 큰 별이 되어있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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