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5-19 11:33
제 45 편 엿장수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111

제 45 편
                                                          엿장수

  “에이 엿이나 먹어라!”
  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정겨운 욕’이 또 어디 있겠나?
  지금은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있지만, 그 시절에는 주전부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고 도대체 뭘 먹어야 할지 종류나 양이 많질 않았다. 그래서
  “에이 이놈아 엿이나 먹어라.”
  하면 ‘엿’ 먹을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지금 엿장수는 전통시장에서 한 점포를 차지하고 어엿한 가게 형태지만 예전의 엿장수는 사람이 조금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길거리 장사였다. 예전 형태의 엿장수는 지역 축제나 시골 오일장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볼거리가 되었다.

  예전 엿장수는 두 가지 형태로 기억하는데 하나는 남루한 옷차림의 엿장수가 나무로 짠 엿 목판을 흰색 광목으로 X자로 두른 다음 양손에는 커다란 가위를 들고 쩔렁거리며 호객을 한다. 엿 목판에는 흰색의 큰 엿 뭉치가 있다. 손님이 오면 양손의 엿가위를 가지고 한쪽 가위는 엿 위에 놓고 다른 쪽 가위로 톡톡 치면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다. 그리고 나선 엿 목판 한쪽에 뿌려져 있는 밀가루를 묻혀 신문지로 만든 봉지에 넣어준다. 양이 적으면 그냥 손에 쥐여 주는데 이때 밀가루를 묻히는 이유는 엿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함이다.

  엿장수는 손님이 있건 없건 늘 엿가위를 장단 삼아 유행가나 민요 가락을 한 바탕씩 하는데 어른들은 엿을 살 생각보다는 엿장수의 노랫가락에 더 흥미를 보인다. 엿장수들은 한결같이 구성지게 노래를 잘도 불렀다. 지금 식으로 본다면 훌륭한 ‘예능인’들인 셈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엿장수는 따로 있다. 낡을 대로 낡은 손수레에 커다란 엿 목판을 들고 크기도 큰 엿가위를 철렁거리며 나타난다. 쩔렁거리는 소리를 신호로 여러 사람이 모여드는데 이미 아이들은 입에 군침이 돈다.

  나는 지금도 ‘생강엿’의 맛을 잊지 못한다. 엿 목판에 떡 하니 자리 잡은 갈색의 큰 엿 덩어리가 있다. 엿 사이사이에는 생강 덩어리와 땅콩이 박혀있다. 엿장수는 대패를 가지고 대여섯 번 슬슬 대패질하면 대패 날 사이로 엿이 말려 나오는데 눈*사탕만 크기가 되면 이쑤시개로 콕 집어 준다. 생강의 매콤한 맛과 엿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기가 막힌 맛이 나온다. 대패질하다가 엿 속에 있는 생강 뭉치가 썰리면 아이들에게는 매워 연방 입을 호호 불며 먹기도 한다. 생각보다 양이 적어 아이들은 늘 엿장수에게 대패질을 한 번만 더 해달라고 하는데 마음씨 좋은 엿장수를 만나면 두 번쯤 더 밀어주기도 한다.

  엿장수의 낡은 손수레 밑에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구멍 난 고무신, 쓰다 버린 양은그릇, 신문지, 잡지 등 폐지, 고장 난 라디오, 녹슨 철사, 찌그러진 수저나 그릇, 소주, 맥주, 사이다병 등 온갖 고물이 즐비하다.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이 있다. 사람들이 가지고 온 온갖 ‘고물’들의 값어치는 그야말로 엿장수가 마음대로 가격을 매긴다. 고물의 상태나 종류, 양 등을 평가하여 거기에 상응하는 엿을 주는데 늘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이들은 엿장수가 나타나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버린 물건을 찾아와 엿을 바꾸는데 단맛의 유혹에 넘어간 아이들이 간혹 멀쩡한 물건을 가지고 나와 엿과 바꾸려다 엄마에게 걸려 귀 쌈을 얻어맞고 질질 끌려가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오래된 집의 고서나 골동품 등이 이 당시 많이 엿장수에게 넘어가지 않았나 싶다. 어쩐지 어떤 엿장수는 갑자기 눈이 반짝이며 엿을 후하게 쳐준 후 급히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더 희한했던 건 강아지와 닭을 가져오기도 하고 고추씨를 가져오기도 했다. 엿장수는 고추씨를 후하게 쳐서 제법 많은 엿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머리카락을 받기도 했다. 물자가 귀하고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뭐든지 가치가 있었다.

  하릴없는 어른들은 엿장수가 오면 몇몇이서 ‘엿치기’를 했다. 엄지손가락 굵기에 연필 길이만한 엿가락을 하나 골라서 뭐라고 주문을 중얼거리다 ‘탁’하고 꺾는다. 엿가락 속의 공기구멍이 상대방보다 크면 이기고 엿 값은 내기에 진 사람이 낸다. 재주와 요령이 필요 없는 게임인데 어른들은 진지한 모습으로 엿가락을 신중하게 고른다. 엿가락이 길거나 짧거나 굵기가 크거나 작거나 무게가 나가나 안 나가나 하는 걸 놓고 자기들끼리 격론을 펼치다 게임을 하는데 주문 같은 걸 외우면서 긴장도를 유지하다 ‘탁’하고 꺾는 순간 엿가락 구멍에다가 있는 힘껏 입바람을 불어넣는다. 엿 구멍을 어떡하던지 더 넓게 보이려고 별짓을 다한다.
  엿 구멍이 엇비슷하면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때 엿장수가 점잖게 나서 판정을 해준다. 아주 단순한 게임인데 그걸 보겠다고 아이들은 엿장수 주변을 빙 둘러싸 까치발을 하며 보려고 애를 쓰고 어른들도 순식간에 머리를 모은다. 좀 유별난 사람은 엿 구멍을 누가 보면 부정 탄다고 얼른 뒤돌아서서 혼자 보다가 타박을 받기도 한다. 승리욕이 강한 사람은 몇 번을 도전한다. 그러다 보니 엿 목판에 꺾어진 엿이 즐비하다. 결국, 꺾어진 엿은 관람객인 우리 아이들의 몫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도 열심히 관전하고 응원을 했던 모양이다.

  엿장수는 한 참 먹고 싶은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당분 공급자이고 엿가위로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고 집에서 버린 고물을 거두는 ‘좋은 아저씨’였고 ‘반가운 할아버지’였다.

  단것을 많이 먹어 이가 썩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때가 줄줄 흐르는 새까만 손가락에 침을 묻혀 엿 목판에 남아 있는 엿 부스러기를 슬쩍 찍어 먹어도 좋았다. 엿치기의 왁자함과 엿장수의 구성진 노랫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기껏해야 지역 축제 때나 추억의 볼거리로 볼 수 있을까?

  길거리의 엿장수는 더는 보기 힘들지만, 엿은 지금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이어져 온다.
  “에이~엿이나 먹어라”
  “엿장수 마음대로다”
  그나저나 요즘 아이들이 ‘엿’ 맛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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