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5-03 09:47
제 34 편 라디오와 신문에 나오다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237

제 34 편
           
 라디오와 신문에 나오다

  3학년인지 4학년인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나는 라디오에 출연한 소중한 경험이 있다. 당시는 중앙방송국이라고 했는데 요즈음 한국방송공사 즉 오늘날의 KBS다.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하는 공개 녹음방송인데 우리 학교 차례가 왔다.  학교에서는 미리 출연자를 선정하여 훈련을 시켰다.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출연 학생이나 선생님들은 며칠 동안 연습을 했다. 프로그램 내용은 단막극 형태도 있고 장기자랑, 노래자랑, 학교소개도 있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우리 학교 최고’ 다.

  녹음 장소는 예전 미군 공병대가 지어준 판자 교실이었다. 낡은 대로 낡은 교사이지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양초칠을 해 겉보기와는 달리 윤기가 반지르르했다. 아마 텔레비전 방송이었으면 절대로 이 장소에서는 하지 않았으리라.

  드디어 녹음 날. 방송사에서 차량이 오고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라디오 방송이니까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들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본래 학교 대표로 선발되지는 않았는데 출연하기로 한 학생이 갑자기 나오지 않아 내가 대타로 나오게 됐다. 내용은 교사와 학생이 2인 1조가 되 주어진 어린이 드라마 원고를 읽는 것이다. 즉 성우처럼 목소리 연기를 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연습도 한번 안 해본 나는 즉석에서 원고를 받아들고 내심 많이 불안했다. 하지만 상대역(?)인 여선생님은 평소 내가 좋아하던 예쁘장한 선생님이셨는데 1, 2학년을 제외하고 남선생님만 담임으로 둔 나는 여선생님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틀리면 그만이지’라는 똥배짱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출연의 의지는 순전히 상대역의 여선생님 때문이다. 3장 분량의 원고였는데 간첩이 나타나면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반공방첩’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단 한 번의 연습도 못하고 현장에서 받아든 원고를 가지고 보기만 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예쁜 여선생님과 함께 원고를 읽으려니 한마디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큐 사인이 떨어졌다. 드디어 시작이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그것도 그럴듯한 목소리 ‘연기’와 함께  피디가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선생님이 나를 잘했다고 꼭 안아 주신다. 나는 잘 했는지 못했는지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예쁜 여선생님이 안아주는 거에만 정신이 혼미했다.

  이렇게 나의 방송 데뷔는 무난히 끝이 났는데 이후 내가 방송으로 밥을 먹고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는 점은 그냥 목소리 좋고 연기 좋으니 성우로 활동할 걸 괜히 폼 잡는다고 피디인지 잡부인지 모를 연출한다고 이렇게 생고생을 했으니 그저 성우가 부러울 따름이다.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4학년 말이었다. 갑자기 복도가 시끌벅적하더니 교감 선생님이 카메라를 어깨에 멘 사람과 함께 교실로 들어섰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소개를 한다. 모모소년신문사 사진기자인데 우리의 수업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우리 학교를 방문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보고 최대한 빨리 서예 준비를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신이 나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연출(?) 된 서예 학습 장면을 만들어 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평교사였는데 학교 서열로는 교장, 교감 선생님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 내의 무슨 행사가 있으면 우리 반이 늘 시범 학급이었다.

  사진기자는 교실의 이곳저곳을 돌며 사진을 찍어 댔다. 아이들은 카메라가있는 쪽을 의식하며 나름대로 폼을 잡으며 연기를 했다. 서예 제목은 늘 그렇듯이 ‘반공방첩’이었다. 기자는 휴대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찍기도 하며 나름 열심히 취재(?)를 한다. 순간 내 눈에 카메라의 렌즈가 들어왔다. 나는 나름 진지하게 연기를 하며 마지막 한 획을 힘 있게 그었다. 순간 카메라의 플래시가 번쩍 터지며 내가 찍힌 듯 한 느낌이 왔다.

  다음 날 집에서 받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1면 중앙에 내가 주인공처럼 잡힌 사진이 떡하니 실린 것이다. 제목은 ‘반공방첩’ 학습인지, 학생들의 서예 학습인지는 기억이 없다.

  나는 내 사진이 실린 그 날짜 신문을 소중하게 보관했다.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집안의 ‘가보’로 보관하리라. 그러나 몇 년 후 이사를 가고 집안 정리를 하다 보니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요즘 아이들이야 워낙 매체도 많고 해서 혹시라도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에 소개가 될 경우가 많겠지만 그 시절에 라디오와 신문, 잡지에 소개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체에 나오고 그러면 뭐 하나? 현재가 좋아야지. 그냥 예전 추억만 소환해서 먹고사는 어느덧 ‘꼰대’가 된 내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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