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2-09 09:37
제 2 편 병원은 나의 놀이터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470

제 2 편                               
      병원은 내 놀이터

  병원이 내 놀이터가 된 것은 내가 무슨 병치레를 자주 하여 병원에 다닌게 아니라 집이 병원 사택이다 보니 병원 구석구석을 보고 다닌 이야기다.

  내가 태어나고 살던 곳은 동대문 안쪽 성벽 옆에 자리 잡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대문 부속병원이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목동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있다.
  내 생가는 이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은 나의 놀이터가 되고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접한 수많은 사람과, 사연 그리고 병원 시설물은 지금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도로지만 당시에는 병원 입구가 있었다. 푸른색 철제 자바라 문은 늘 열려 있지만, 파월장병 시가행진이나 큰 시위가 있으면 닫혀있고 우측 쪽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었다. 통금이 시작되는 자정에는 문을 닫는다.

  병원 입구는 매우 가팔랐는데 우측에 하얀색 작은 목조건물은 경비실이다. 경비실에는 경비 아저씨 두 명이 맞교대로 근무를 서고 종로 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명이 자주 들락거렸다. 한 형사는 젊었고 다른 늙은 형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순사를 했다고 한다. 늙은 정보과 형사는 예전 시절이 그리워서였는지 늘 ‘당꼬’ 바지에 ‘도리 구찌’를 쓰고 다닌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눈매는 매우 날카로웠다. 가끔 수갑을 꺼내 흔들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잡아간다고 날 놀리기도 했다.
나를 보며 혼잣소리로 옛날이 참 좋았는데…하며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병원 직원들은 늙은 정보과 형사를 보면 괜히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과 형사들하고는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에는 하얀 3층 건물이 한 채 서 있는데 외래였다. 앞에서 보면 1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3층 건물이었다. 여기서 접수를 하고 내과, 외과 등 각 과의 외래 진료를 보았다. 집 뒤에 야외 변소를 가기 싫거나 하면 외래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자주 들락거렸다. 하지만 오후 6시면 문을 잠근다. 하릴없이 외래를 놀러 가면 대기실 복도나 진료실에서 환자, 의사할것 없이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진료를 봤다. 병원 복도나 진료실에서 담배를 버젓이 피운다는 생각은 지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외래건물 뒤쪽에는 동대문교회와 담을 같이 하고 있는데 석축이 높고 길어 늘 어둡고 침침하였다. 하지만 거기가 나의 주 놀이터였다.

  외래건물 옆으로는 정구 코트가 있다. 의사들이 여유시간이 되면 거기서 ‘정구’ 경기를 하고는 했다. 병원 체육대회를 하거나 의대생, 간호대생들이 체육대회를 하는 날은 배구, 정구, 계주 등을 하였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의대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이 있다. 교실은 놀러 가봐야 책걸상과 칠판만 있어 재미가 없기에 별로 가지는 않았다.

  외래 병동 앞에는 넓은 마당과 빨간 벽돌로 매우 아름답게 지은 2층 건물이 있는데 임상 병리나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곳이다.
 나는 지금도 그 건물이 철거된 것에 대해 매우 가슴 아프다.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많은 건물이었을 텐데 무작정 철거를 하여 과거와의 단절을 해버렸으니 지금도 많이 아쉽다.
  1층 한쪽 구석에는 채혈실이 있어 매주 특정 요일이면 ‘매혈자’들로 넘쳐났다. 당시에는 피를 돈을 주고 팔았기에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왔다. 마당 끝에는 ‘매혈자’들을 위한 목조로 지은 간이변소가 있는데 목조가 썩지 말라고 ‘콜타르’를 잔뜩 발라 나무 색깔이 새까맣다. 가끔 소독약을 뿌려 약 냄새가 많이 나기도 했다.
 
  변소 뒤로는 조그만 채소밭이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배추나 이런저런 채소를 재배했다. 가끔 변소에서 똥바가지로 똥오줌을 퍼 거름으로 준다고 채소밭에 뿌릴 때면 냄새가 진동해서 병원 높은 사람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 정도 경작을 하고는 밭을 갈아엎었다.

  그즈음 아버지에게도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각목과 판자 그리고 철망을 가지고 오셨다. 아기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며칠 뚝딱거리시더니 엉성하지만, 닭장 비슷한 걸 만들었다. 다음 날 중닭 몇 마리를 닭장에 넣고 나보고 사료나 물을 잘 챙겨주라고 하신다. 나는 책임감 있게 사료와 물과 채소 잎 등을 모이로 주며 잘 키웠다. 중닭은 금방 자라서 아침마다 우리 가족에게 단백질 덩어리인 유정란 몇개를 선물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닭장에서 달걀을 가져오는 게 나의 일이었다. 그러나 닭 사육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탉이 아침마다 큰 소리로 울어대는데 동대문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냈다. 닭이야 자기가 수컷임을 만방에 알리고 생리적 현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은 소음이었다. 시골도 아니고 종로 6가 한복판에서 수탉 소리라니…결국, 수위아저씨의 채소밭과 우리 아버지의 닭은 그렇게 사라졌다.
 
  병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쭉 올라가면 큰 마당이 나온다. 마당 왼쪽에는 영안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단층 빨간 벽돌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예배실이었다. 영안실은 낡은 건물에 음습하였다. 다른 부속 건물 없이 달랑 한 채가 있는데 어린 마음에도 거기는 무서워서 자주 가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안실 마당 한쪽 구석에 미군 ‘스리쿼터’를 개조한 낡고 못쓰게 된 병원 구급차가 세워져 있는데 주요 부품은 다 뜯겨 없지만 나 같은 아이들이 놀기에는 최고다.

  영안실 앞의 작은 예배실은 수요일이나 일요일에 병원 직원이나 의대생, 간호대생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곳이다. 안에는 오르간이 있는데 가끔 멀리서 들리는 은은한 오르간 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예배실 옆에는 큰 미루나무가 있는데 태권도를 잘하는 동네 형이 거기다 군용 ‘떠블빽’(더플백)에다 모래를 넣어 나무에 걸어 놓고 발차기와 정권 연습을 했다.

 예배실을 끼고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병원 본관이다. 입구에서 쭉 올라와도 본관이기에 본관을 가려면 두 군데 길로 올라가야 한다. 병원 본관은 백색 건물인데 4층 정도로 기억된다. 본관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 둥글게 램프로 돌출되어있다. 돌출된 곳은 경사진 통로로 휠체어나 이동식 침대가 다니도록 맨드라미 식으로 되어있다. 병실은 2.3층으로 기억되고 4층은 기숙사로 돼 있어 입구에는 ‘남성출입금지’라고 나무로 만든 안내판이 있다. 나는 ‘남성’이지만 어린아이였기에 무시로 출입을 했다. 기숙사는 침대가 군대 막사처럼 양쪽에 일렬로 쭉 들어섰고 각 침대에는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다. 일단 들어가면 여자들 특유의 냄새가 나서 ‘어린 남성’인 나도 야릇한(?) 생각이 났다.

  한번은 병원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는데 해부학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해부학 교실은 천장 위를 투명 유리로 만들어서 위에서 부감으로 해부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끔 해 놨다. 내가 어찌해서 거기까지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사체의 온몸을 절개하여 벌려놓았다. 나는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으로 한참을 보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들켜 쫓겨나왔다. 그때의 경험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도 피나 처참한 모습을 봐도 전혀 무섭거나 느낌이 없다. 아마 의사가 되었으면 뛰어난 해부학자가 되었을 텐데….

 병원 조리실에는 어머니 친구분이 근무를 하셨다. 가끔 놀러 가면 하얀 조리복과 위생모를 쓰신 나에게는 일명 ‘은주아줌마’가 열심히 조리하고 계셨다. 다 만들어진 음식물은 내부 조그만 승강기를 이용해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거기서 생애 처음 맛보는 ‘크로켓’ (일명 고로케), ‘동그랑땡’, ‘수프’ 등을 맛봤다. 맛은 기가 막혔다. 양식은 별로 즐기지 않지만 어릴 적 그 맛이 살아나 지금도 잘 먹는 음식 중의 하나다.
 
 본관 오른쪽에 역시 붉은색 벽돌 단층 건물이 하나 있다. 1층은 기억이 나지 않고 지하에는 매점과 식당이 있었다. 병원에서 나를 아는 직원들이 나를 보면 예쁘다고 가끔 매점에서 주전부리를 사 주고는 했다.

  병원 본관 왼쪽에는 쓰레기장과 노천 소각장이 있는데 트럭 몇 대부분의 쓰레기가 많이 쌓여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서는 늘 연기가 나며 타는 냄새와 알 수 없는 냄새들이 섞여 있었다. 링거병, 석고붕대, 주사기, 약솜, 피가 잔뜩 묻은 거즈 등이 마구 버려져 있는데 어린 내가 봐도 불결하고 위생이 엉망이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래도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본관 왼쪽으로는 나무문이 하나 있다. 나무문을 지나면 본관 뒤로 전혀 다른 세계가 나온다. 다양한 꽃나무를 심은 정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양철로 만든 ‘퀀셋’ 건물이 몇 동 있다. 지대가 높아서 인지 소음도 없이 고즈넉했다. 아버지는 근무가 끝나면 거기서 책도 읽으시고 휴식도 취하셨다.

  병원의 배치가 전체적으로 가파른 언덕을 이용해 만들어서인지 한겨울에 갑자기 눈이 많이 오면 본관 쪽으로 올라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잊지 못할 사고가 있었다. 미군 트럭을 개조한 구급차가 본관에서 내려 오다가 브레이크 파열로 경비실 옆 의자와 담을 부수고 동대문 앞 도로에 거꾸로 뒤집혔다. 다행히 인도를 지나 차도로 떨어졌기에 걷던 행인은 피해가 없었고 도로에 차량도 한산해서 운전기사만 다치고 말았다. 빨간 벽돌로 만든 담벼락이 부서지며 인도 아래로 떨어졌는데 천만다행으로 마침 보행자가 없었다.    나는 사고 나기 불과 몇 분 전에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한 동네 형하고 의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기에 나도 천운이었다.

  종로 6가 한복판이었지만 병원이라는 특수성과 직원들의 친절함으로 나는 누구 못지않게 유년의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1970년 종로 6가에서 동대문구 휘경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후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동대문 병원을 한동안 보고 갔는데 갈 때마다 나의 ‘생가’는 헐리고 도로가 나고 병원 건물이 철거되더니 급기야는 이대병원은 목동으로 이전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대문 성곽공원과 디자인재단이 들어서 예전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또 하나의 슬픈 기억은 내 바로 밑에 여동생이 대학 졸업반 가을에 급성백혈병으로 이대병원에서 28일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기가 자란 곳에서 23세를 일기로 먼저 간 것이다.  지금도 그쪽을 지나가다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유년의 추억과 동생의 죽음이 오버랩 되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살아있다면 60대 중반이 되어 ‘할머니’도 되었을 텐데….
 보고 싶은 예쁜 내 동생 금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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