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3-23 11:35
제 15 편 은주누나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322

제 15 편

은주 누나

  나에게는 누나보다 더 친누나 같은 10여 살 차이 나는 ‘은주 누나’가 있었다. 은주 누나의 어머니가 어머니 친구분이기도 했고 병원 조리실에 근무하셨기에 우리 집 하고도 가깝게 지냈다. 지금도 젊은 시절 두 분이 사진관에 일부러 가시어 찍은 낡은 흑백 사진이 있다.

  은주 누나는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보다는 다섯 살 정도 위로 친형이 없는 나는 그 형을 친형처럼 따랐다.

  67년으로 기억나는데 은주 누나가 여고를 막 졸업했다. 누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시행되고 있는 시절이라 어머니는 은주 누나에게 매일 놀 궁리만 하는 나를 공부를 시킬 요령으로 과외 공부를 부탁했다. 누나는 용돈도 벌 겸 나를 붙잡고 공부를 시키는데 누나는 학교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는 나를 공부시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외는 누나 집으로 가서했다.

  이대병원 뒤 충신동 꼭대기에 집이 있어 계단을 많이 올라가야 했다. 대신 힘들게 올라가면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참 좋은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공해가 심하지 않아 날이 좋으면 서울의 전경이 거의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집을 비둘기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도 그랬지만 누나도 나를 가르치는 것에는 큰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딱 기본만 하고 둘이서 놀러 다니기에 바빴다.

  누나는 우리 어머니가 주시는 과외비로 용돈은 비교적 넉넉했다. 그 돈을 자금 삼아 명동으로 남산으로 멀리 광나루로 놀러 다녔다. 맛있는 빵을 사먹기도 하고 나는 부모님과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은주 누나를 통해서 경험했다. 나에게는 은주 누나와의 만남이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10년 정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누나도 나를 믿고 의지했다. 

  어느 뜨거운 여름에는 동대문 기동차 종점에서 기동차를 타고 광나루로 물놀이를 갔다. 지금 워커힐 호텔 강 건너편이었는데 그 시절에는 서울 시민들이 한여름에는 물놀이를 많이 하러 왔다. 한강이 아직 오염이 덜 돼서 그런지 물은 비교적 깨끗했다. 가끔 똥 덩어리가 내려와 기겁을 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수영을 할 만 했다.

  누나는 광나루 백사장을 여기저기 찾는듯하더니 어느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은 수영복과 파라솔 등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남자와 나온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는 온몸이 까맣게 그을려 한눈에 봐도 멋졌다. 나를 동생이라고 소개하고는 둘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데 썩 잘 어울렸다. 잠시 후 형이 트럭 타이어에서 뺀 ‘주브’(그때는 튜브를 그렇게 불렀다)를 주면서 나보고 수영을 하고 놀라고 했다. 둘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 일게다. 나는 신이 나서 한참을 놀다가 와보니 어느 틈에 누나가 까만 원피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모래밭에서 둘이 엎드려 이야기를 한다. 나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외면하고 멀리 아차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고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누나와 나는 집에 오는 내내 별 말이 없이 왔다. 우리 집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데 누나가 나에게 다짐을 받듯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알았노라 하고는 헤어졌는데 누나는 얼마 후에 광나루 남자와 헤어 졌다고 한다.

  나는 그때 은주 누나가 어른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냥 나이 많은 친구처럼 생각했는데 20대 초반의 성숙한 여자였다.

  누나의 가정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충신동 입구에서 리어카에다 도넛을 만들어 팔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대병원 조리실에 근무하는데 이혼은 안 했지만 남남처럼 지내고 있다. 가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술이 취해 와서 마누라를 내놓으라고 주정을 부린 적도 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은주 누나와 밑에 남동생인 창완이 형 그리고 은주 어머니가 교대로 우리 집을 방문해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가족 간의 안부를 물어보는 이상한 곳이 됐다. 어린 내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아 나는 그게 더욱 신기했다.

  그렇게 저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70년 나는 종로 6가에서 휘경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게 은주 누나네 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친누나가 우연히 은주 누나를 봤다고 한다. 모 호텔 입구에서 일본인 남자 관광객들과 함께 있는데 아는 척을 하니까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라고 한다. 누나 생각에는 아무래도 당시 한참 유행하던 기생관광을 하러 온 일본인 같고 은주 누나는 ‘다찌’(현지처)처럼 보였다고 한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상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믿고 싶지 않다. 은주 누나가 ‘다찌’라니 이건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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