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3-10 10:01
제 11 편 겨울나기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491

제 11 편

겨울나기

  없이 살수록 추운 법이다. 60년대 중반은 너나 할 것 없이 대체로 형편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은 나에게는 추운 기억이다. 지금처럼 난방이 보편화되고 의복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옷은 무조건 두텁게 껴입고 화목이나 연탄으로 한 겨울을 났다. 그래도 나 같은 아이들은 추운 줄 모르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추위를 이겨냈다.

  우리 집은 30년대에 지은 한옥이었다. 그나마 각 방 아궁이는 화목이 아닌 연탄으로 난방을 했기에 연탄만 넉넉하게 준비하면 그럭저럭 겨울을 지낼 말했다. 초겨울에 접어들면 어느 날 집 앞에 연탄을 가득 싶은 트럭이 한대 온다. 보통 삼 백장 정도 집 안에 들이는데 손바닥만 한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인부 세 명이 반나절 동안 연탄을 나른다.

  본격적으로 추위가 닥치면 부모님은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수시로 아궁이를 확인하신다. 각 집에서는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연탄 갈기를 기본으로 배운다. 나도 부모님이 안 계시면 내가 수시로 연탄을 가는데 연탄가스를 맡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겨울철 당시 신문에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사는 연탄가스 중독 사고였다.

  동네에서도 수시로 들리는 이야기가 누구네 집 누군가 연탄가스를 맡아 어떻게 됐다는 등의 이야기가 한겨울의 화제였다.
  우리 집도 동생이 연탄가스를 맡아서 동치미 국물을 한 대접 마시고 살아났다. 연탄가스에는 동치미 국물이 당시 집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응급조치였다.

  연탄불은 아무리 화력이 좋다고 해도 한옥의 구조상 외풍이 엄청 심했다. 요를 갈아둔 아랫목은 뜨끈뜨끈하고 좋으나 구들장을 잘못 논 집 윗목은 그냥 냉골이었다. 우리 집은 그래도 윗목은 미지건 해 지낼 만 했다.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등짝은 뜨끈해서 좋은데 숨을 쉬면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자리끼’라고 자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려고 머리맡에 둔 물이 아침에 꽁꽁 얼어 대접에 손을 대면 쩍쩍 달라붙을 정도다. 벽에 난 쪽창에는 성애가 잔뜩 내려앉아 숟가락으로 긁어내면 빙수처럼 하얗게 떨어질 정도였다.

  방한용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내복을 입고 지낸다. 여자들은 빨간 내복, 남자들은 흰색이나 미색 내복을 주로 입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엑스란’ 내복은 제일 고급으로 쳐 아무나 입지 못 했다. 형제가 많은 집은 위로부터 물려 입었고 어른들은 여기저기 기워 입기도 했다. 내복은 한번 입으면 보통 한 달 이상씩은 입은 것 같다. 추운 겨울에 땀 흘릴 일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목욕이나 세탁을 자주 못하던 시절이니 그저 빨리 봄이 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한겨울 큰 선물이 질 좋은 내복이었다. 내 생각이지만 지금도 자식이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계절에 관계없이 내복을 사다 드리는 게 당시에 추억이 아닐까 싶다.
  솜씨가 좋은 어머니는 뜨개질을 잘 하셨다. 집 안 농을 뒤져 털실로 짠 오래된 스웨터의 실을 풀러 뜨거운 물에 한 번 삶으셨다. 삶아진 털실은 잘 말린 후 동그랗게 감아 뜨개질을 하셨는데 만약 실이 부족하면 이실 저실을 이어서 하기도 했다. 완성된 스웨터는 실색이 안 맞으면 총천연색 옷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도꾸리’라고 목이 긴 셔츠를 그렇게 불렀다. 오래 입다 보면 팔꿈치는 닳고 소매 쪽은 실이 풀려 너덜대기도 했지만 따뜻하기는 그만이다.

  어른들은 미군용 내의나 방한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니기도 하고 ‘유엔(UN)모자’라고 귀를 덮을 수 있는 방한모를 머리에 쓰고 다녔다. 아이들은 장갑을 잘 잊어버려서인지 장갑 양쪽을 실로 잇고 손이 통째로 들어가는 '벙어리장갑'(지금은 엄지 장갑이라 부른다)을 하고 다니고 귀에는 토끼털로 짠 귀마개를 하고 한겨울을 지낸다.

'없는 집' 아이들은 최소한의 방한 수단도 부족하여 늘 손이 빨갛게 터져있거나 귀가 얼어 있어서 항상 손을 바지춤에 넣거나 귀를 만지곤 한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늘 누런 코를 달고 하루 종일 훌쩍거리고 다닌다.

  겨울 방학이 되면 당시 동대문운동장에 있는 야외배구장 혹은 정구장에는 임시로 스케이트 링크가 개장된다. 링크라고 해봐야 바닥에 비닐을 깔고 주면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짧은 벽을 쌓은 후 거기다 물을 채워두면 워낙 날이 추워서인지 금방 얼어버린다. 한낮에 얼음이 녹지 말라고 광목천을 길게 이은 후 스케이트장 끝에서 끝으로 걸어 둔다. 그러면 햇빛이 들지 않아 얼음이 쉬 녹지를 않는다. 나는 집이 종로 6가라 동대문운동장으로 다녔지만 시내 안쪽에 살던 친구들은 창경원, 덕수궁 등으로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스케이트장 입구에서 스케이트를 빌려서 탔다. 일정한 돈을 맡기면 신발 사이즈에 맞는 스케이트를 빌려주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타다 보니 날이 엉망이다. 그런 날은 스케이트장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날갈이’ 아저씨에게 돈을 주고 날을 간다. 자주 다니다 보면 단골이 생기기도 하고 날 가는 비용을 깎아 주기도 한다.
  날을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우선 스케이트를 뒤집어 날을 위로 향하게 고정 한 다음 접시만 한 원형 숫돌로 날 위아래를 열심히 왕복하여 날을 간다. 그리고는 사포로 옆면을 문지르면 날이 새파랗게 선다. 주인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자기 손톱을 깎아 보이며 잘 갈렸다고 한다. 날이 잘 선 스케이트를 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빙상 선수처럼 폼을 잡고 스케이트를 탄다.

  우리들은 스케이트라고 하지 않고 ‘스케또’, 또는 ‘시게또’라는 엉터리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다.
  이웃집 아저씨와 그 집 아이들하고 자주 갔는데 이웃집 아저씨는 딸 부잣집이었다. 큰딸이 누나와 친구이기도 했고 아들이 없다 보니 내 생각이지만 나를 특별히 더 귀여워하신 것 같다. 아저씨는 스케이트를 잘 타셨다. 어린 나를 붙잡고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주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저씨가 아버지처럼 여겨지곤 했다. 무엇보다 몇 바퀴 돌고나면 아저씨는 맛있는 ‘오뎅’(어묵)을 사주시곤 했는데 지금도 그 맛을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가끔 아주 예쁜 여학생이 ‘피겨’ 스케이트를 멋지게 타며 돌고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주목을 하며 부러워했다. 한편에서는 체격 좋은 형들이 ‘하키’를 타다가 여학생들 앞에서 갑자기 멈춰 얼음가루를 휘날리기도 했다. 그러면 여학생들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유일한 실내빙상장이 동대문에 있었다.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라고도 하고 동대문 실내빙상장이라고도 했다. 현재 지하철 동묘역 근처인데  지금은 헐리고 SW 컨벤션 센터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한일 대학생 친선 아이스하키 대회가 열렸다. 일본의 와세다대학과 한국의 고려대학이 맞붙었는데 결과는 기억나지 않지만 경기 내용은 비등했다. 어쩌다 입장권이 생겨 동네 형하고 응원을 가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스케이트를 사주셨다. 제품 이름은 잘 기억 못하지만 무슨 사람 이름의 스케이트였는데 제법 비싸게 주고 산 제품이었다. 이제는 이 사람 저 사람 타던 스케이트를 빌리지 않아 날을 잘 간 후 길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동대문운동장을 가서 신나게 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열 대여섯쯤 돼 보이는 ‘형’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우리가 갖고 있는 스케이트보다 훨씬 더 좋은 스케이트를 바꿔 주겠다고 속이고 나와 내 친구를 종로 3가까지 데려갔다. 그리고는 우리 손에서 스케이트를 받아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느 건물로 들어간 후 ‘함흥차사’였다. 순간 불길한 생각에 친구와 나는 건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를 못 했다. 소위 ‘네다바이’를 당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머니가 사 주신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신삥’인데 그걸 눈앞에서 ‘사기’를 당했으니 집에 가서 뭐라 할 것인가. 며칠은 어머니가 눈치를 못 채셨다. 나중에는 친구한테 빌려 주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속마음은 겨울이 빨리 지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결국 돌아오는 겨울에 들통이 났지만 어머니는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알고 봤더니 동대문운동장 근처에서 그런 사기가 많이 벌어진다는 보도가 나올 때였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그런 식으로 사기를 당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겨울의 또 다른 재미는 포천 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보내고 오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항렬이 낮다 보니 나에게는 나이 어린 이모, 삼촌들이 많아 같이 놀기에는 그만이었다. 순전히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와는 달리 외갓집 친척들은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초가집에서 살고 있기에 전형적인 시골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추수를 끝낸 빈 논에 물을 대고 하루만 지나면 꽁꽁 얼어버린다. 바로 천연 스케이트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스케이트를 가지고 가도 타기가 쉽지 않았다. 얼음 사이사이로 잘라낸 볏짚이 한 뼘 내지 반 뼘쯤 올라와 있어 자칫 잘못하다간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골 아제들은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며 한겨울을 보낸다. 나도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썰매를 타고 노는데 조금 큰 아제들은 소총 탄약통 뚜껑을 이용해 외날 썰매를 즐겨 탄다. 탄약통 뚜껑을 뒤집어 날을 삼고 긴 나무 끝에다 못을 박아 스틱처럼 사용하며 논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썰매도 무쇠를 잘라 제법 스케이트 날처럼 만든 게 있는가 하면 그냥 굵은 철사 줄을 날로 삼아 타기도 한다. 썰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짧은 막대기를 이용해 논을 달리다 보면 어느덧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기도 한다.
 
  한참을 땀을 흘리고 놀다 들어오면 외할머니가 감자, 고구마, 군밤 등을 화롯불에 구워 주시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비단 외갓집뿐만 아니라 한마을이 다 집성촌이고 친인척 관계이다 보니 나는 어디 가든지 서울서 왔다는 이유 하나로 턱을 많이 입었다.
  나는 나이 비슷한 이모, 삼촌들 앞에서 ‘서울이야기’를 신나게 하면 그들은 넋을 잃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당시만 해도 고향을 떠나오기가 쉽지 않고 결혼을 해도 인근에서 살기에 서울 같은 대도시를 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나대로 시골 생활을 접해 보지 않았기에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호롱불, 변소, 아궁이 등이 불편하기는 했어도 놀거리는 지천이고 하루가 언제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지금 외갓집은 단 한 분의 외숙모만 생존해 계시고 다 돌아가셨다. 어릴 적 항렬 무시하고 ‘야자’ 하며 지냈던 많은 삼촌과 이모들은 지금 만나면 나이 많은 조카를 편하게 대하고 오히려 나는 어려워한다. 항렬의 힘이다.

  요즘보다는 당시의 겨울이 훨씬 추웠는데 마음은 참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더 추워졌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나만이 느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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