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일 : 23-03-09 09:22
제 10 편 동네 바둑
글쓴이 : 박감독
조회수 조회 : 512

제 10 편 
                                       
 동네 바둑

  내가 살던 동대문 이대부속병원 경비실 위에는 조그만 잔디밭이 있다. 잔디밭에는 휴식용 긴 의자가 세 개가 있는데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나 직원들이 가끔 앉아서 쉬다 가는 자리였다.

  나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거나 하면 ‘반성의 시간’을 가지려고 찾는 곳이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병원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보면 동대문 지붕을 눈높이로 볼 수 있는 시야가 확 트인 전망 좋은 곳이었다. 전차를 보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꿈도 꿀 수 있는 자리였다. 소나무와 향나무도 심어져 있어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의 휴식처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집안에 있으면 덥기도 하려니와 좁은 한옥이 답답하기도 해서 얼마 전 아버지가 사다 주신 ‘미니 바둑판’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바둑판은 원래 크기의 사 분의 일 정도 크기에 경첩을 달아 반으로 접으면 휴대하기도 아주 간편했다. 요즘도 이런 제품이 여행용으로 나온 걸 봤다. 바둑돌도 작아 앙증맞고 귀여웠다. 그러나 누가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집안에 바둑 두는 사람도 없는데 아버지가 왜 이걸 나에게 사주셨는지는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날은 처음 보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병원 쪽만 바라보고 있다. 웬만하면 그곳에 오는 사람들을 다 기억하는데 처음 보기도 하려니와 소아마비 장애가 심해 한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대충 17~8세쯤 돼 보이는 나보다는 한참 형뻘이었다.

  내가 바둑판을 들고 쭈뼛거리며 의자에 가 앉았는데 한동안 서로 모른 척하다가 형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어디 사나부터 시작해서 나이와 학 교와 이름을 물어보는 ‘호구조사’가 끝나고 나더니 바둑판에 호기심을 보인 다. 바둑을 둘 줄 아느냐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자기가 가르쳐 준다고 한다.
내가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자 형이 자기 이야기를 한다.

  자기는 어릴 적에 심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이야기 부 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계 수리기술을 배우려고 준비 중에 있는데 집에서 심심풀이로 혼자 바둑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다리를 유심히 보니 한 쪽 다리는 가늘고 짧아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다른 다리도 가늘고 짧은 데 발끝이 겨우 땅에 닿을 듯했다. 목발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심한 장애였다. 목발은 오래돼서 색깔이 벗겨지고 가운데 손잡이는 붕대로 칭칭 감았는데 손때가 묻어 흰색은 사라지고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얗다.

  내가 머뭇거리자 바둑판을 달라고 하더니 ‘오목’부터 하자고 한다. 나도 오목은 할 줄 아니까 한번 해보자고 해서 둘이 오목을 두는데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재미가 있다. 아마 형이 내가 흥미를 갖게끔 봐주면서 한 것 같다. 그날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다리를 저는 형도 모처럼 재미가 있었는지 다음 날 형이 또 왔다.
  종로 6가 동대문 안쪽에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는 시원한 나무 그늘 오목을 두는 재미가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바둑 수업이 시작됐다. 조그만 바둑판과 앙증맞은 바둑 돌을 가지고 얼마나 진지하게 바둑을 두었는지 어머니가 저녁 먹으러 들어 오라고 할 때까지 무아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구경하던 어느 어른이 자기랑 한번 두자고 해서 둘이 붙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치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리 저는 그 형이 아마추어 2~3단쯤 되는 실력이었다. 같이 붙은 어른들이 번번이 지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가는 경우를 몇 번 봤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둘의 인연은 무더위가 가시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온다 간다 말없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오던 형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안 안 보이니 내심 걱정이 됐다. 이제 나도 막 바둑에 재미를 느끼려고 하는데 아쉽기만 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오목의 적수는 없고 이제 바둑만 어느 정도 두면 되는데 배우다 말았으니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두달 배운 바둑 실력이 9급까지 갔다. 그게 나의 마지막 바둑이 되었다. 그 이후 다시는 바둑판을 접할 일도 바둑을 둘 일도 없어졌다. 만약 그때 다리 저는 형에게 바둑을 제대로 배웠으면 지금쯤 어느 기원에서 ‘내기 바둑’이나 두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바둑 용어 몇 개 정도인데 덤, 꼼수, 포석, 패착, 묘수, 자충수, 무리수, 호구, 사활, 대마불사, 초읽기 등등은 비록 바둑은 모르지만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다,

  지금도 ‘미니 바둑판’을 보거나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청소년을 보면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오래전 ‘그 형’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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